2003년에 신안군에서 실시한 학술용역 가운데는 "자랑스런 신안인 선양 및 신안 이미지 제고" 사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 학술용역은 신안과 관련된 역사적인 인물들을 선양하여, 기존의 낙후된 이미지를 씻고 새로운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인물에 대한 종합적인 학술용역을 실시한 것은 전국에서 최초의 시도로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 또한 이 학술조사에 참가하면서 우리 신안군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많은 훌륭한 인물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인물들의 역사를 통해서 섬으로 이루어진 도서지역 특유의 문화적 전통이 존재하고 있음을 재인식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하의도의 덕봉강당과 김연 선생을 들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의도' 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을 먼저 떠올리게 된다. 또한 한편으로는 작은 섬 마을에서 한 나라의 대통령이 배출되고, 한국인 최초로 노벨 평화상까지 수상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무얼까 궁금증을 갖기도 한다. 그것은 아마도 하의도가 지니는 지적전통에서 그 배경을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지적전통은 초암(草庵) 김연(金鍊, 1883∼1959)이라는 재야 학자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연은 암울했던 일제강점기를 살다간 이 시대의 마지막 학자 중 한 분이다. 높은 학식과 절개, 효성을 겸비하여 하의도는 물론 인근 지역의 존경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1883년 5월 8일 하의면 대리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현찬(顯贊), 혹은 공빈(公彬)이라 했고, 자(字)는 석연(錫鍊), 호는 초암(草庵), 성암(誠庵)이라 했다. 당시 도초에 거주하던 '김인겸'이라는 분에게 학문을 익혔으며, 평생을 유학에 심취하여 학행일치를 몸소 실천하였다. 김연은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는 국치를 당하자 흑산면 가거도 산중으로 은거하여 오로지 학문에만 힘을 쏟았다. 하의도보다 더 먼바다에 위치한 곳으로 은거해야 했던 그의 행동에서 지조를 중시하는 유학자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가거도로 은거한 지 8년이 지난 1912년에 이르러서야 선생은 하의도 향림(鄕林)들의 요청에 못 이겨 다시 고향인 하의도로 돌아왔다. 이후 선생은 '봉람제(鳳覽齊)'라는 서당을 열고 후학을 지도하는데 열중하였다. 선생의 훌륭한 학문과 인품이 널리 알려지자 타 지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배움을 청해왔고, 그 제자가 수백에 이르렀다. 하의도에 지금의 초등학교인 하의공립보통학교가 생긴 것은 1934년이었는데, 그 이전까지 하의도 주민들은 대부분 이 봉람제에서 글공부를 하였다. 김대중 전 대통령도 어린 시절 이곳에서 수학했다고 한다. 봉람제에서 학문을 배우다가 하의도에 초등학교가 생기자 입학하였고, 그곳에서 3학년까지 다니다가 4학년 때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목포보통학교(현 북교 초등학교)로 전학가게 된다. 초암 김연의 학문과 인품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때문인지 김대중 전대통령은 초암의 후손인 김춘배 옹을 자신의 스승을 대하듯 예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익히 알려진 대로 엄청난 독서광이다. 책읽기의 습관이 오늘날의 자신을 만들어 주었다고 늘 이야기 해 왔는데, 이 또한 김연 선생의 영향을 받은 측면이 있다. 후학을 지도하는데 열중하던 김연 선생의 유일한 취미는 경서와 전적을 수집하는 일이었다. 당시 학문을 익히는데 필요한 서적이라면 국내는 물론 중국·일본에까지 연결하여 약 4,000여권(166종, 1,441책)의 고서를 평생동안 모았으며, 이를 모두 외우다 시피 반복해서 읽었다고 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그 많은 전적들과 스승의 독서하는 모습을 보면서 자신도 언제나 책과 가까이 하는 습관을 가지게 되었을 지도 모른다. 김연 선생이 평생 수집한 이 서적들은 2001년 신안군에서 건립한 유물전시관에 현재 보존되고 있다. 교통과 통신이 모두 불편한 섬 마을의 이름 없는 선생 한사람이 4,000여권의 고서를 수집해서 후손들에게 전승했다는 점 자체가 타지역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다.
김연 선생에게 배움을 청하기 위해 하의도를 찾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자 이에 감복한 제자와 인근 유림들은 1952년 선생의 집 후원(대리마을의 덕봉산 아래)에 '덕봉강당(德鳳講堂)'을 세웠다. 현재도 이 건물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고 후손인 김춘배 옹이 대를 잇고 있다.
하의도 사람들의 김연 선생에 대한 존경심은 지금도 매우 대단하다. 지역의 어른으로서 존경을 받았고, 하의도에 크고 작은 일이 생기면 언제나 김연 선생을 찾아가 상담을 하고, 그의 지시에 어김없이 따랐다고 한다. 출세를 위했다면 육지에 나가서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었던 분이나 고향을 지키며, 후학을 돌봤다며 그에 대한 추억을 이야기한다. 하의도의 인물이 아니라 전라도의 큰 어른이었다고 자랑한다. 일생을 학문과 후학양성에 노력하던 선생은 1959년 77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선생의 저술은 문집 7권으로 남아 있으며, 이는 1989년 『초암선생문집』이라는 이름으로 영인본이 발간되었다.
초암 김연 선생의 존재와 덕봉강당은 신안군 도서지역의 지적전통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신안, 절해고도 유배지로 취급받던 신안의 작은 섬들에는 이렇듯 알려지지 않은 문화적 배경이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인근 섬에 이름 난 학자가 있으면 마을 주민들은 어떻게 하든 그 사람을 자기 마을로 모셔와서 수학을 청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섬 마을 특유의 학문적 전통이 있었기에 초암 김연과 같은 학자가 존재하였고,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같은 인물이 작은 섬 마을에서 배출될 수 있었을 것이다.
신안 사람이라는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만한 훌륭한 문화적 전통이 신안군에 존재했고, 지금도 그 맥은 도서를 지키는 신안 군민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